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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 시인 진은영이 말하는 삶에 대한 희망

moment Mobile 2011. 10. 26. 21:49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혼자서 걸어 지나갈 수 없는 <자본주의> 속에서 시인은 그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해저 깊숙한 곳에 뚫려 있는 터널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평상시에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인 <혁명>이라는 길은 보일 엄두조차 낼 수 없다. 그녀는 이 <자본주의>라는 이 어두운 터널 속에서 물에 불은 나무토막처럼 <슬픔>에 잠들 때 <문학>이라는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을 통해 위안을 삼으려 하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다시 <시인의 독백>이라는 피리로 터널의 벽을 쳐보기도 한다. <시>는 여전히 그곳에 살지 않는다. <봄>은 놀라서 뒷걸음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아야 하는 것처럼 그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시인에게 있어서 <봄>은 찾아올 것 같지 않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이와 같이 지금의 사회에 찾아올 것 같지 않은 <봄>이라는 가치, 즉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우리’를 위한 변화를 향한 노래이다. 시집을 통해 우리는 현실을 향한 다양한 시인의 목소리와 이 밖에도 시인의 개인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집, 가족 그리고 불안이라는 이름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진은영의 <가족>이라는 시를 읽고 난 서늘한 느낌은 강렬하다. 우리 일상에서 당연시 여기는 이 사건이 가족이라는 제목을 달고 난 뒤에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다가오니 정도가 더 크게 느껴진다. 어쩌면 카프카의 삶과 진은영이라는 시인이 삶이 많이 닮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등받이 의자에 앉아서 세상을 통치하셨습니다. 아버님의 의견만이 옳았고 다른 모든 의견은 얼빠진 터무니없고 정신 나간 의견이며 비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아버지의 자신감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논리의 일관성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으며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속의 있는 글이다. 카프카의 집안에서 그의 아버지는 섬세한 면은 전혀 없고 저항을 허용하지 않는 독재자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의 것들은 모두 낡은 것, 정신 나간 것으로 매도하였다고 한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지배자이자 독재자였다. 그의 작품에서 아버지는 극복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선고>와 같은 작품에서 보았듯이 작품 속의 카프카로 대변되는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래도 <변신>과 같은 작품에서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초반에라도 누이와 어머니로부터 동정을 받았다. 하지만 진은영 시 속의 화자는 그 누구의 동정도 관심도 받지 못하는 철저한 타자이다.
 
내 방이었습니다 /구석에서 벽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천장 끝에서 끝까지 /수십 개의 발로 기었습니다 /다시 벽을 타고 아래로 바닥을 정신없이 기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다리를 가지고도 문을 찾을 수 없다니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 소리 /아버지가 숨겨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 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변신 속에서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후, 자신이 가진 여러 개의 발로 방 안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장면에서 모티브를 얻은 느낌의 장면이다. <벌레가 되었습니다>에서 화자는 문을 통해 나가길 욕망한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놓은 약과 모기향 때문에 벗어날 수 가 없다. 화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화자를 구체적으로 겨냥하여 위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은 아니다. 시 속에서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화자에게 불안의 요소이다. 이는 동생을 포함한 가족 전체로 확장된다. 그들은 화자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그들이 스스로 화자를 향해 규정한 상태 속에서 그를 억압한다.
 
나는 드릴처럼 튼튼한 이를 가진 쥐였다 /내 가족이 사는 집 콘크리트 벽에 구멍을 내고 숨어들고 싶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 /집에 가려면 수챗구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당의 내부를 장식했던 꽃 쓰레기들과 /제사 때 먹다 버린 과일들 /누군가 시궁창에 매달아놓았다 /파란 모기떼 인도하는 어두운 길 따라가면 /오! 내 어머니 사시는 곳 /나는 돌아왔다 //집의 붉은 혀가 /깊은 뱃속으로 삼켜버렸다
 
<귀가> 속의 화자는 쥐이다. 그는 집을 떠나기보다 그 속에서 도피를 꿈꾼다. 이미 그는 그 공간의 힘을 깨달은 무력한 자아인 것이다. 가족공동체에서 획일적으로 행해지는 종교적 강요는 ‘성당의 내부를 장식했던 꽃 쓰레기들’로 가부장제의 권위는 ‘제사 때 먹다 버린 과일들’로 그려지고 있다. 구멍을 뚫어서 숨은 곳은 종국에 어머니가 사시는 곳이라고 한다. 시 속의 그 공간은 부정적이고 위압적인 공간으로 그려졌다. 카프카의 <선고>처럼 진은영의 두 시 속의 화자들은 불안의 요소인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화자 스스로의 한계가 아닌 환경적인 요소로 돌리고 있다.
  

<바깥 풍경>과 같이 가족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도 있다. 작품 속에서 가족은 동정의 대상이다. <아버지는 무얼 낚고 계실까/ 소문만 무성하던 금빛 고기떼 /어디로 갔는지, 흐르는 폐수 사이 /언뜻 본 듯 만 듯>에서 아버지는 폐수 속에서 가족을 위해 생활과 투쟁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할머니와 동생들은 화자에게 있어서 짐이 되지만 이에 대한 불만을 어머니께 토로하면 그것에 상처를 받는다. <엄, 마, 제, 발, 독, 촉, 하, 지, 마, 세, 요, /슬쩍 흘겨보면 江風에도 플라스틱 꽃처럼 /잎사귀 하나 떨구지 않던 어머니, 이상도 하지 /내 어린 숨결에도 시드네> 스물세 살의 화자는 이 바깥 풍경들 속에서 비애감을 느낀다. 전작들과 상반된 이 작품은 시인의 어떤 마음에 의해 써진 것인지 궁금하다.
 
변화 향한 시선
 
<그림 일기>에서는 시인의 세상을 향한 애정을 바라볼 수 있다. 결핍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 보충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결핍된 세상은 정체되어 있는 세상이다. 변화를 통해서 그 정체는 보충이 의미하는 진보의 세계로 나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변화시켜야 할 정체된 세상은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의 철문 안에 오랜 시간 아무런 의미 없이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던 허위의식이기도 하며 <견습생 마법사>의 화를 잘 내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관념이기도 하다.
 
<청춘1>, <청춘2>, <봄이 왔다>와 같은 시에서는 시인의 열정을 향해 달려가는 노력을 찾아 볼 수 있다. 현실에 대한 판단도 분명치 않고 맞아 죽는 것이 아닌 깔려 죽고 싶을 만큼의 열정은 가지고 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화자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보수로 대변되는 초록 페인트 통 속에서도 진보의 열정인 붉은색을 위해 손목을 자르는 강함도 희망한다.
 
시인은 <달팽이 대장> 속에 비가 그치고 뜨거워진 벽을 오르는 달팽이 대장과 같은 열정의 의지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행동을 기대한다. <악어를 위하여> 속에서 사냥꾼의 총성에 희생된 악어일지라도 변화를 향한 우리들의 움직임은 세상을 향하여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는 작가의 기대가 보인다.
 
거위의 희고 많은 깃털들 밑에 눈동자 /사과 팔다 매맞아 죽은 왼쪽 눈동자 /집 지키다 깔려 죽은 오른쪽 눈동자 /나는 눈 감고 싶어라 /좌우 시선을 피하고 싶어라 /이 털을 다 뽑고 나면 더 많은 눈동자들 //눈동자가 흘리는 진물이 내 입으로 들어옵니다 /몸을 공명시키면 작은 강도 깊게 울립니다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젊은 눈동자 /감옥에 무기수로 잡혀 있는 시의 눈동자 /내가 죽인 거위 눈동자 곁에 다른 눈동자 /묻어드리고 싶습니다
 
<마더구즈>의 시어 중의 <눈동자>를 노동자라는 단어로 바꾸면 구체적인 상황이 그려진다. 노동자들은 결국 자본주의 및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속에는 영세민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희생당한 투사들, 예술가들의 모습이 있다. 눈동자는 희생당한 그들을 목격하는 역사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물가에서 기다린다 /새끼 거위들 /복수하러 오리라 /부리에 피 맺히도록 쪼아대리라 /꽤액꽤액 울면서 나는 /이야기 하나씩 지어내리라 //나는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목소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역사의 기록을 외면하고 침묵을 지킨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의 표상을 표현하고 있다.
 
한 알의 밀알로 썩어 /거대한 밀밭을 꿈꾸는 사람들 //나는 하나의 밀알로 썩어 /세상의 모든 바람이 취기로 몰려오는 /한 방울 향기 /아득한 밀주 /아무런 후일담도 준비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단을 위하여 희생이라는 행동을 할 때는 거대한 그 속에 매몰되어 안주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라지만 시인은 후일담조차 없는 즉, 부는 물론 명성 같은 것도 원치 않은 채, 변화를 위해 스스로를 던지기를 바라는 듯하다. 물론 이 희생은 거대한 자본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진은영 (문학과지성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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