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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 변신, 오늘 밤의 끝은 어딜까?

moment Mobile 2011. 10. 26. 21:51




어떤 집단에서 생활 하다보면 원래 본인이 가지고 있던 모습보다 과하게 행동할 때가 있다. 그것이 그 집단에서 자신을 어필하고 적응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스스로 가정하여 적용을 하게 된다. 본인은 그 행동이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그와 같은 과잉을 통해서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진짜 모습을 잃는다고 느끼게 된다. 집단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서 나름 살아남기 위해서 사회화라는 이름 아래서 우리는 많은 변신과 같은 시도를 꾀한다. 그것이 타인의 관점에서 자주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우리는 계속 시도하게 되며 역시 스스로와 많은 갈등을 취하게 된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현대를 살아가는 보통의 우리와 다르게 다른 대척점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에 반하여 그는 자신의 존재를 타인의 인식을 통해서 취하고자 한다.

처음 이 글을 읽으면서 과연 그레고르가 언제부터 자신이 변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궁금했다.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던 그의 내면 묘사는 읽는 내내 의아심만을 줄 뿐이었다. 이게 웬걸? 그레고르는 아침에 깨었을 때, 이미 자신이 변신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변신에 대한 두려움은 없고 온통 직장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스스로 실존에 대한 지각은 없이 오로지 타인, 가족에 대한 인식만이 존재했었던 것이다. 정말 슬픈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이 괴물인데... ... 내가 만일 그레고르였다면 믿지도 않는 신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왜 하필 내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내가 이런 형벌을 받아야 할까? 분명히 이것이 현실인지에 대한 수많은 확인 과정을 할 것이다. 무수한 확인과 현실에 대한 탐색이 끝나면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괴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살을 할 것인가? 아마 괴물로서의 인생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상 평생을 도망자 신분으로 지낼 것이다.

그레고르가 회상했던 과거에서도 본인의 삶을 누리는 즐거움이란 것은 없었다. 온통 가족에 대한 봉사로 가득했다. 어떻게 하면 가족의 빚을 갚을까라는 고민 밖에 없었다. 즉, 인생에 있어서 삶은 없고 생활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레고르가 뒤늦게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천장에 거꾸로 걷는다던지 썩은 음식에 대한 기호를 통한 것이다.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도 변신 이후에 생긴다. 이럴 때, 적합한 단어가 ‘비로소’가 아닐까싶다.

자식들은 부모님의 소중함은 그분들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깨닫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는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대부분인데 안타깝게도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 그레고르는 비로소 그에게 인생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의식의 전개도 크게 전진하지 못한다. 단순히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살리고 싶어 하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의 인식의 극단은 가족이 가구를 옮길 때, 액자에 붙어서 보여준 마지막 항거이다. 자신의 흔적 또는 이전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잃는 것을 가족들이 인정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레고르의 변신을 알고 있는 존재들은 오직 가족들뿐인데. 그들이 그의 변신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은 그레고르로 존재했던 그의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오직 벌레와의 공존만이 그 공간에 남아 있을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젠가는 그레고르의 존재가치에 대하여 망각하게 될 것이며 그 벌레를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몰아낼 것을 원할 것이다.

그레고르는 저항했다. 아버지에게 공격을 당하고 방안에 꼼짝없이 지내게 된다. 이 처절한 상황을 작가는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독자에게 일종의 아이러니를 제공한다. 마치 우리가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보면서 그의 희극화를 통해서 일종의 유쾌함을 느끼지만 더 나아가서는 산업화에 매몰된 개인의 비극을 처절하게 느끼는 것과 같다. 아버지의 공격의 도구는 사과였다. 우리는 인간에게 먹는 음식을 던지지 않는다. 가끔은 짐승에게 먹으라고 그가 위치한 반경에 음식을 가까이 던져주는 행동은 한다. 하지만 음식을 도구화하여 짐승에게 맞추는 행동은 반지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제 그레고르는 삶의 극에 온 것이다. 더 이상 누구도 과거에 존재했던 그로서 인식하기를 두려워한다. 오히려 그 괴물이 그레고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암묵적으로 그와 같은 인식이 그들의 생활을 이끌어 가는 것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공론화조차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제 가족들도 그레고르가 없는 삶을 준비하게 된다. 그들을 서서히 그를 망각하고 싶어한다. 아버지는 사환, 어머니는 란제리 부업, 동생은 점원 일을 하면서 경제 주체인 그레고르가 없는 생활을 이끌어 간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힘들지만 그들은 잘 살아간다. 그것이 현실이다.

동생이 하숙생들 앞에서 음악 연주를 하고 있을 때, 그레고르는 최후의 몸부림을 친다. 누이만이라도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란다. 최후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 하지만 그동안 누이는 가족 안에서 무시를 받다가 괴물이 된 그레고르를 잠시나마 돌보면서 자기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가로서 새롭게 탄생하는 가족에서 한 자리 차지하게 된다. 마치 치매 노인의 수발을 들던 며느리가 가족 안에서 자신의 힘겨움을 억지로 피력하면서 그 자신의 가치를 역설하려는 것 같다. 그 며느리는 나중에 자신의 수중으로 며느리를 가지게 되면 분명히 과거의 자신의 경험을 훈장이나 되듯이 엄청난 연설을 풀어 놓을 것이다.

더이상,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레고르는 굶어 죽는다. 이것은 자살이 아닌 정교하게 자살로 가장된 타살이다. 꿈을 잃고 분신자살을 시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기업은 비정규직이 한 때, 그들의 소속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경제성의 원리로 그들과의 공존을 두려워한다. 그들을 대체할 다른 인력을 2년 단위로 찾고 있다. 가족이라는 단위에서 경제 주체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실직을 통해서 그들의 존재 가치를 침해당하게 된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누이를 다시 음악 공부를 시키고 싶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교육을 자식에게 제공하고 싶었던 꿈도 상실하게 된다. 거기에 인간이란 노동을 통해서 허무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존재 가치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다. 꿈,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모두를 상실한 이들은 마지막으로 투쟁을 시작한다. 절름발이는 갈 곳을 잃고 절벽 앞에서 바다를 향해 소리치지만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면 되냐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절름발이는 산으로 갈 힘이 없다. 태생적인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신분제도가 폐지된 현대지만 노동자란 계급은 보이지 않은 신분으로서 그들의 한계를 스스로 깨닫게 한다. 법원에 가서 소리칠 수도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건물 첨탑이나 크레인에 올라가서 단식투쟁을 하는 행동뿐이다. 최후에는 더 이상의 삶에서 의미를 못 찾고 그레고르의 마지막처럼 분신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죽음이 가족에 의한 정교한 타살이 듯, 그들의 자살은 역시 사회구조에 의한 타살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선고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진 절름발이에게도 꿈은 있다. 아직도 그의 두 팔은 자유롭고 그는 그것들을 통해서 무엇인가 하기를 꿈꾼다. 장인이 되어서 적당한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는 그 돈을 통해서 휠체어를 마련하고 더 나아가서 그 휠체어를 끌어줄 사람까지 고용해서 그가 꿈꾸던 세상으로 가기를 꿈꾼다. 마침내 그는 큰돈을 모았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점점 썩어서 그는 서서히 생명을 잃어간다. 고통 속에 살 것인가 안락사 할 것인가는 그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게오르그도 마찬가지로 그의 또 다른 자아인 친구의 삶을 꿈꿔왔다.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돈을 벌어서 이제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굴레는 그에게 있어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이 힘없는 늙은 존재의 사형 선고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인 것이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저 친구가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 듯하다. 이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굴레는 우리에게 어떤 명확한 답의 제시 없이 그 불확실함에 우리는 수긍해야만 한다. 아마도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그와 같은 커다란 굴레란 것은 존재하는가보다. 예전에 안기부와 같이 그 권력이 너무나 커서 그 크기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모두 가리어서 심지어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평생을 안고 가는 어떤 열등감일지도 모른다. 올림픽에서 은메달만을 따다가 선수 생명이 끝나서 은퇴하는 한국의 운동 선수처럼 그 꼬리표는 평생을 따라 다닌다. 비운의 은메달리스트라는 명함이다. 이것은 2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다.

선고의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마도 게오르그는 햇빛이 일렁이는 강물에 자신의 몸을 던졌으리라. 한계를 깨닫고 완벽한 자유를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개인의 최후는 비참함 못지않게 엄숙함과 아름다운 이미지를 선사해준다. 적어도 나에게는...

어차피 행복이라는 것은 학습되는 것이다.




변신 시골의사(세계문학전집 4)

저자
프란츠 카프카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0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세기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현대문학의 불멸의 신화가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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